2019. 10. 26. 08:19ㆍ정부 · [ 종합 ]
우리 정부 "당장 피해 없다" WTO 개도국 포기… 농민들 WTO 탈퇴 반발
향후 WTO 다자 협상이 타결되면 쌀·마늘·고추 등 관세가 높은 농업 분야 타격은 불가피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 / WTO 농업 협상 교착상태 / 정부 "당장은 피해 없어" / 관세·보조금 감축 가능성 여전 / 농민들 반발 미국 의식한 결정 / 자동차 관세·방위비 협상 등 현안 산적
우리 정부가 앞으로 진행될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 우리나라의 개발도상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은 피해가 없지만 향후 WTO 다자 협상이 타결되면 쌀·마늘·고추 등 관세가 높은 농업 분야에서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25일 정부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대외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미래에 WTO 협상이 전개될 경우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1995년 WTO에 가입하며 개도국 지위를 주장했지만,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농업 분야 외에는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농업만 예외를 둔 덕에 우리나라는 쌀이나 마늘, 고추 같은 작물에 여전히 300~600%의 높은 수입 관세를 매기고, 농산물 가격 유지를 위해 농가에 지원하는 보조금도 선진국보다 여유가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 선언이 당장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고 밝혔다. 미래에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 협정으로 확보한 관세 및 보조금 특혜는 유지된다는 말이다.
홍남기 부총리는 "이번 의사결정 과정에서 쌀 등 민감 품목에 대한 별도 협상 권한을 확인하고,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닌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8년 WTO의 농업 분야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에서 제시된 수정안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면 쌀을 '민감 품목'으로 보호하더라도 현재 513%인 관세율을 393%로 낮춰야 한다. 농업 보조금 총액도 현재 1조4900억원 규모에서 8195억원으로 한도가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그러나 DDA 협상은 회원국 간 의견 차가 커 2008년을 끝으로 10년 넘게 중단된 상태다. 한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차기 협상 개시 여부 및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고, 향후 진행될 협상에서 기존의 선진국·개도국 구분이 유효할지 역시 불확실하다"며 "미래 협상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돼 충분한 시간을 갖고 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농업계는 당장은 피해가 없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관세와 보조금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33개 농민단체로 구성된 농민공동행동은 이날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는 것은 한국 농업을 미국의 손아귀에 갖다 바치겠다는 것"이라며 입장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농업인 소득 안정을 위해 '공익형 직불제'를 조속히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직불금 수령 농가에 환경·생태 등 각종 의무를 부과하는 공익형 직불금은 WTO가 감축 대상으로 삼는 농업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향후 우리 정부는 협상이 진전돼 보조금 허용 규모가 줄어들어도 직불금을 지급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또 1조원을 목표로 조성 중인 농어촌상생협력기금에 대기업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늘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의 결정은 다분히 미국을 의식한 조치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국가로, 미국이 제시한 개도국 배제 네 가지 기준(OECD 회원국, G20국, 세계은행 분류상 고소득국, 세계 무역 비중 0.5% 이상 국가)에 모두 해당해 정부로서도 더 이상 버틸 명분이 없다. 미국이 개도국 지위 포기를 종용하며 데드라인(23일)까지 제시한 마당이라, 고집을 피우다간 중국처럼 미국과 맞서는 모양새로 비칠 수 있다.
이는 다음 달 예고된 미국의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자동차 관세 결정과 내년 예정된 한·미 방위비 협상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일 수 있다. 또 지난 8월 일본 수출 규제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결정한 현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종료일(11월 23일) 전까지 결정을 되돌려 놓으라"는 압박을 받는 등 미국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은 상황이다.
안덕근 서울대 교수는 "정부 입장에선 명분도 실익도 없는 개도국 지위를 계속 주장해 미국을 불편하게 할 이유가 없다"며 "미국과의 관계에서 최근 입지가 약해진 우리 정부가 필요 최소한의 조치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WTO 개도국 혜택은 WTO 협정 내에서만 유효한데, 향후 새로운 WTO 협정이 타결될 가능성이 낮아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OECD 같은 선진국 모임에서 '한국은 개도국이 맞느냐'는 공격적 질문이 종종 나오는 등 국제사회 내 신뢰 문제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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