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7. 08:07ㆍ사진 · [ 갤러리 ]
"한양도성" 궁궐이 발아래 600년 서울을 품다.
경복궁 궁궐이 발아래 "조선 최고의 관광지, 순성" / 창의문에서 숙정문 지나 삼청공원까지 / 서울의 독특한 경관과 역사 체험 동시에 / 선비들 하루에 성곽 길 완주하며 과거급제 기원 / 백악마루는 순성 길 중 최고의 조망 자랑 / 10회 연재 통해 도성의 과거와 현재 풀어내 / 사소문 중 가장 오래된 성문, 창의문 / 분단의 아픔 간직한 1.21사태 소나무 / 한양도성 성곽 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청운대 / 백악 곡장 ‘성안으로 갈까, 성 밖으로 걸을까’ / 문을 닫아 음기를 막아라, 숙정문 / ‘말(馬)일까, 말(末)일까’ 전설 속 말바위
성곽도시‘서울’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600년 서울의 두터운 역사와 숨결을 오늘의 길에서 만나며 천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발 아래를 내려다보자 화려한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길게 펼쳐진다. 김 진사의 시선이 품계석이 세워진 근정전 뜰에 고정된다. 국왕이 정기적으로 신하들을 모아 놓고 조회를 하는 장소이자, 국가의 중요한 행사와 의식이 벌어지는 바로 그 자리 “내 기필코 이번 대과에는 급제 하련다. 가문을 일으키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리라”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은 길이가 18.627㎞나 된다. |
과거를 보기위해 경상도 상주 땅을 떠나 한양에 다다른 김 진사는 성 밖에서 하루 유숙한다. 다음 날 새벽, 성문이 열리는 시각인 파루(罷漏)를 기다려 아침 일찍 순성 길에 올랐다. 40리 순성 길 중 가장 오르기 힘든 백악산 정상, 백악마루에 서서 한양도성을 바라본다.
좌청룡 낙타산과 우백호 인왕산 그리고 맞은편 목멱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내사산 능선을 따라 용트림 하듯 굽이치고 성곽도시‘서울’은 어제와 오늘을 잇는다. 한양도성 순성 길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닌 600년 서울의 두터운 역사와 숨결을 만나며 천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한양도성 순성 길 아래를 내려다보자 화려한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길게 펼쳐진다. 김 진사의 시선이 품계석이 세워진 근정전 뜰에 고정된다. 국왕이 정기적으로 신하들을 모아 놓고 조회를 하는 장소이자, 국가의 중요한 행사와 의식이 벌어지는 바로 그 자리... 김 진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내 기필코 이번 대과에는 급제 하련다. 가문을 일으키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리라...”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은 길이가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르고 전국 팔도에서 상경하는 백성들에게 멀리 보이는 한양도성은 반가움과 조선 백성으로서 자긍심이었다.
몇날 며칠을 길게는 보름 넘게 걸어서 온 이들이었으니 먼발치에서 한양도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드디어 한양이구나’ 싶은 안도감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나 과거시험을 보러 상경하는 선비들의 경우 한양도성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 보러 온 선비들 중에는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급제를 비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정조 때 학자인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놀이”라면서 “순성 길은 필운대의 살구꽃, 성북동의 복사꽃, 오간수문의 버들이 유명하다”고 기록했다. 그의 아들인 유본예(1777∼1842년)도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봄과 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한양도성 순성은 전통행사로 이어져왔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일간신문 ‘매일신보’ 1916년 5월 14일자에 ‘금일은 순성하세’라는 제목으로 지면의 절반 이상을 할애해 한양도성 순성을 다뤘다.
오늘날 서울시도 옛사람들의 순성놀이를 계승해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서울시 한양도성 홈페이지에 따르면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하고 있다.
1968년 발생한 ‘1·21 사태’ 이후 52년 만에 북악(백악)산 길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1993년에는 인왕산이 2007년에는 서울의 소중한 역사를 시민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북악산의 구간별 개방이 시작되었다. 지난해 11월 1일에는 청와대 뒤편 북악산 북측 면이 둘레길로 조성돼 52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많은 시민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창의문(彰義門)은 의(義)를 드러내는 문이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를 잇는 성문으로 평지 보다 높은 언덕에 있다. 창의문은 궁 안과 궁 밖의 경계이며, 도성 안을 흐르는 청계천이 시작하는 곳이다. 도성 밖 홍제천은 백악산 빗물이 흘러 만든 역사의 현장이다.
400여 년 전 인조 반정군은 홍제원에서 말을 타고 홍제천 물을 거슬러 세검정에 모였다. 말을 탄 능양군은 병사 700명을 이끌고 출전해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을 불태웠다. 마침내 광해군을 경운궁 석어당에서 무릎 꿇렸다. 인조대비의 윤허를 받아 즉조당에서 인조로 즉위하였다. 가슴 아픈 역사의 시작점이 바로 창의문(彰義門)이다.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백악마루 백악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언제나 힘들다. 가파른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에 삼각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족두리봉에서 향로봉과 비봉 그리고 보현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초록이 물든 5월에 백악을 오르는 길은 예로부터 순성 길의 시작이다. 지친 몸을 잠시 성벽에 기대어 뒤돌아보면 인왕산 기차바위와 정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양도성 내사산 중 가장 높은 백악산(白嶽山, 342m)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다. 구름 걷힌 백악마루 정상에 서니 발아래 경복궁과 광화문 지나 숭례문까지 일직선상에 들어온다. 남쪽에 산이 있으니 봉수대가 있는 목멱산(남산)이다. 빌딩 숲 사이로 좌청룡 낙타산과 우백호 인왕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성벽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한양도성은 우리는 물론 세계인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백악산 정상에서 백악곡장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성곽 길에 아픈 상처를 드러낸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원이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는 서부전선을 넘어 삼각산 진관사를 거쳐 백악산까지 내려왔다. 53년 전 청와대 습격 직전 우리 군경과 교전이 있었다. 백악구간 성곽 옆에서 벌어졌다. 총탄을 온 몸으로 받아 낸 소나무만 그날을 웅변하고 있다. 15발의 탄흔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보안상의 이유 등으로 백악마루에서 볼 수 없는 사방의 풍경이 마침내 청운대에서 열렸다. 백악산 아래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 따라 종묘까지 사방이 탁 트인 풍경이다. 청운대(靑雲臺)는 한양도성 성곽길 18.627km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공간이다.
눈앞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과 정문인 광화문 지나 육조거리인 광화문 광장이 펼쳐진다. 뒤를 돌아보면 삼각산의 세 봉우리인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이 보인다. 이곳은 백악산에서 가장 평평한 언덕이 있는 서울의 경관 명소이자, 한양도성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쉼터이다.
잠시 청운대에서 숨을 돌렸다면 다시 순성 길에 나서보자. 어디로 갈 것인가? 도성 안으로 걸어도 도성 밖으로 걸어도 백악곡장(曲墻)을 만날 수 있다. 곡성(曲城)으로도 불리는 곡장은 성벽의 일부를 둥글게 돌출시켜 쌓은 성을 말한다. 성 밖을 더 잘 살피고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위 각자성석에는 “순조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감독은 이동한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해 성벽을 보수했다”고 새겨져 있다.
위 각자성석에는 “순조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감독은 이동한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해 성벽을 보수했다”고 새겨져 있다.
도성 안을 걷는다면 성벽에 쓰여진 글자를 볼 수 있다. 도성을 쌓은 사람의 지역과 감독관까지 실명으로 적어 놓았다. 각자성석(刻字成石)이다. 조상의 숨결과 역사의 순간이 적혀있다. 정으로 다듬고, 여럿이 힘을 합쳐 목도로 운반하는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순성 길을 안내한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은 “백악산을 기준으로 한양도성 97구간 곳곳에 각자성석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274개 이상이 발견되었는데 각자의 시기별 특징과 구간별 축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으니 한양도성은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강조한다.
도성 밖을 걷는다면 높은 성벽과 성을 쌓은 시기에 따라 달라진 성벽의 성돌들을 볼 수 있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성벽과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옥수수 같은 성돌 그리고 정방형돌을 사용한 흔적이 도성 밖 성벽에 남아 있다. 정확한 크기로 깎고 다듬어 정교한 성벽으로 맞춰지고 쌓아져 장벽이 되고 경계가 되었다. 시간의 흐름과 축성기술의 변천과정이 백악산 도성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도성 안과 도성 밖으로 걸어도 백악 곡장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바로 이곳이 한양도성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을 유지한 순성길, 백악구간 역사길이다.
600여 년 한양도성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백악산 곡장 아래 성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직벽을 오르는 것 같은 45도 기울기의 지형에 성곽을 쌓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다.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듯 성곽 바위틈을 비집고 노란 민들레가 새 생명을 피어냈다.
숙정문 전경
백악산에서 낙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한양의 북쪽 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 보인다.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처마 끝으로 솟아있는 소나무의 그늘 옆, 숙정문 홍예 안으로 들어간다.
숙정문은 조선시대 대부분 폐쇄되어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곳은 시체나 죄인을 압송하던 길로 쓰였으며 또 이곳의 문을 열어 두면 한양의 여인들이 바람이 난다 하여 문을 거의 닫아 두었는데 가뭄이 들면 남대문을 닫고 이곳의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말바위는 삼청공원 안에 있는 바위이다. 말바위는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이곳에서 말을 묶어놓고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하여 말(馬)바위라 불렀다는 설과 백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는 설도 있다. 예전에는 바위에 벼락이 많이 친다 해서 벼락바위라고도 했다. 이곳 주변으로 성북구와 종로구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숙정문에서 창의문을 지나 말바위안내소에서 패찰을 반납하고 말바위 경관 명소를 지나 경사길을 20여분 내려가면 삼청공원에 도달한다. 역시 숙정문에서 성곽을 따라 혜화문이 있는 왼쪽으로 내려가면 와룡공원이 나온다. 모두 숙정문에서 20여분 거리지만 와룡공원 방향이 조금 걷기 편하다. 삼청공원 아래 삼청동이나 와룡공원 아래 성북동 모두 먹거리, 볼거리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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